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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는 체스의 여신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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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네 임 송진우
제      목 5.빌헬름 슈타이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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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7-12-16 조  회 수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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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슈타이니츠 (Wilhelm Steinitz, 1836~1900) - 초대 챔피언

슈타이니츠는 수많은 대회 입상에 세계 챔피언 자리까지 올랐지만 말년을 무일푼으로 보내다 1899년 뉴욕의 정신병원에 입원, 1900년 병원에서 사망했다. 슈타이니츠의 정신질환은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나는 영국인 이었고, 영국에서는 오스트리아인, 오스트리아에서는 유태인이었다.’라는 슈타이니츠 말년 인터뷰에서 세계 어디를 가도 정착하지 못하던 떠돌이의 외로움을 알 수 있다. 반면 오늘날 체코,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까지 제각기 슈타이니츠를 자국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빌헬름 슈타이니츠는 1836년 프라하 (현재 체코 공화국의 수도) 유태인 빈민촌에서 13명의 자녀 중 9째로 태어났고 동생 4명을 포함 형제들 태반이 어릴 적 사망하였다. 당시 프라하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통치를 받았고, 슈타이니츠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에나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슈타이니츠가 체스를 처음 배운 것은 12살 무렵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체스를 시작한 것은 비에나 학창 시절이었다. 폴 모피가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세계적인 명성을 떨쳐 전 유럽에 새로운 체스 열풍을 일으키던 때였다. 빈민 가정 출신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슈타이니츠는 비에나 체스 카페들을 떠돌며 내기 체스로 생활비와 학비를 벌다 차츰 학업을 뒷전으로 하고 체스를 본업으로 삼는다.

1861년 비에나 챔피언십에서 우승하자 1862년 제2회 런던 체스대회에 비에나 체스협회는 슈타이니츠를 오스트리아 대표로 출전시킨다. 생애 첫 국제대회에서 6등이라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내며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당시 세계 체스의 중심이었던 런던에 눌러앉는다. 조셉 블랙번(Joseph Blackburne)을 비롯하여 런던의 최고수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1866년에는 은퇴한 폴 모피를 제외하고 세계 최강이라 불리던 아돌프 안더슨과의 대결에서 8승6패로 이기면서 비공인 세계 챔피언이 된다. 1872년 안더슨의 수제자였던 요한 주커토트 (Johanne Zuckertort, 1842~1888) 마저 7승4무1패의 전적으로 누르고, 1873년 까지 런던, 비에나에서 열린 여러 마스터급 대회에서 우승한다. 그 뒤 약 9년 간 반 은퇴 생활을 하며 이론 연구와 집필에 전념한다.

프랑소와 필리도, 하워드 스톤턴, 폴 모피 등이 전략적 체스의 초석을 다졌으나, 아돌프 안더슨, 조셉 블랙번, 요한 주커토트 같은 대부분의 당대 마스터들은 여전히 수읽기에 의존한 화려한 전술 (Combination) 위주의 체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슈타이니츠도 처음에는 당대 마스터들과 비슷한 유형이었으나, 9년간의 반 은퇴 생활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당대 전술적 마스터들의 체스는 주도권을 잡기위한 선제공격이 모든 게임의 최우선이었다. 슈타이니츠가 정리한 이론은; 기물들의 유리한 위치 선점, 유리한 폰 구조와 이에 대한 기물들의 뒷받침 등등 작은 이점을 모으기 전에는 시도하는 선제공격은 정확한 방어에 의해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준비된 공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방어가 먼저 이루어져야 공격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82년 국제대회에 복귀한 슈타이니츠는 참가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하나 1883년 열린 당대 최강의 고수들이 모두 모인 런던 대회에서 주커토트에 이어 2등을 한다. 단 한 번의 대회 우승으로 주커토트는 세계 최강자를 자칭할 때 슈타이니츠는 미국으로 이민 간다. 3년간의 협상 끝에 1886년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슈타이니츠와 주커토트가 맞붙는다. 먼저 10승을 거둔 쪽이 승자가 되는 대결로 사상 최초로 ‘세계 챔피언’이란 공식 명칭을 놓고 겨룬 시합이었다. 미국 뉴욕, 세인트 루이스 그리고 폴 모피의 고향 뉴올리언스를 오가며 열린 세계 최초 체스 챔피언십에서 슈타이니츠는 초반 4대1까지 뒤졌으나 중반 이후 열세를 극복하고 10승5무5패로 역전 초대 챔피언에 등극한다. 2년 뒤 슈타이니츠는 미국으로 귀화하고 주커토트는 사망한다. 미하일 쉬고린 (Mikhail Chigorin, 러시아, 1850~1908)과 (2회), 이시도 군스버그 (Isidor Gunsburg, 헝가리, 1854~1930)를 상대로 한 방어전에 성공하고 1894년 에마누엘 라스커 (Emanuel Lasker, 1868~1941, 독일)에게 챔피언 자리를 내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슈타이니츠는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대인관계가 좋지 않았고 다른 체스 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내면에 그 당시 체스계의 사회적 모순점이 숨어있다. 중세부터 유럽에서 체스는 귀족과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갑자기 갑부가 된 자본가들도 체스를 비롯한 여러 스포츠클럽을 상류층 사교계 진출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체스계도 아마추어리즘을 제창하며 대부분의 마스터들이 형식적이나마 의사, 변호사 같은 소위 ‘존경받는 직업’을 갖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가난뱅이들이 체스나 스포츠를 통해 돈 벌이 하는 것을 멸시했었다. 빈민촌에서 태어나 대학조차 졸업하지 못한 ‘타짜’ 출신 슈타이니츠가 다른 체스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다.

슈타이니츠가 비록 당대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오늘날 ‘근대 체스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다. 5대 챔피언인 막시밀리언 오이베(Maximilian Euwe, 1901~1981, 네덜란드)가 ‘슈타이니츠 이후로 체스는 재미없어졌다.’라고 했을 정도로 슈타이니츠를 계기로 더 이상 수읽기를 기초로 하는 화려한 공격은 깊은 전략에 근거한 방어 앞에 성공 할 수 없어졌다.
[2013-02-10 23:30:25] ㅇㅇ 님의 글
잘읽었어요~
[2011-04-27 20:01:25] 전용준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