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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는 체스의 여신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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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네 임 송진우
제      목 2.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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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2007-10-24 조  회 수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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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와 르네상스를 거친 체스는 비록 귀족과 상류층 사이에 큰 인기를 누리나 여전히 머리 좋은 사람이 이기는 잡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즉 상대방 기물을 많이 따먹거나 직접적인 공격으로 상대방을 체크메이트 시키는 것이 승부의 관건이었다.

체스를 이런 잡기에서 과학이자 예술로 승화시킨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 필리도(Francois Andre Danican Philidor·1726∼1795)다. 어려서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필리도는 6세 때부터 소년합창단에서 음악공부를 겸하다 변성기가 된 14세 때 프랑스의 수도 파리로 가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한다. 비록 필리도가 신동이라 불릴 정도로 음악에 재능은 있었으나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당대 쟁쟁한 음악가들에는 못 미쳤던 것 같다.

음악 개인교습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던 필리도는 우연히 데 라 레젠스(de la Regence)라는 카페에서 레갈(Kermur·Sire de Legal)이라는 당대 파리 체스계의 최강자를 만나 체스에 빠지게 된다.

필리도의 체스 실력은 급속도로 성장해 입문한 지 3년 만에 레갈의 실력을 뛰어넘게 된다. 필리도는 또 1744년에 사상 최초로 눈가리개를 한 상태로 2대국 다면기를 시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성적은 1무1패로 저조했으나 이 대국은 필리도를 하루아침에 파리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새로 얻은 유명세 때문에 필리도는 한 유랑 악단에 취직한다. 하지만 악단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파산을 하고 만다. 땡전 한 푼 없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필리도는 할 수 없이 체스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이 일이 오히려 필리도를 당대 체스의 최고수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쉽게 자금을 모은 필리도는 런던으로 건너가 당대 영국 최고수라 불리던 스타마(Stamma)를 상대로 8승2패, 그리고 얀슨(Sir Abraham Janssen)을 4승1패로 차례로 물리친 뒤 네덜란드로 돌아온다.

일약 세계 최강자가 된 필리도는 1748년 네덜란드에서 ‘체스의 분석’(L’analyse du jeu des Eschecs)이라는 책을 집필한다. 르네상스 이후 많은 체스 마스터들이 체스를 연구하고 책으로 남긴 것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루이 로페즈(스페인·1530∼1580)가 최초로 중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초반 오프닝과 기초 전술을 위주로 한 연구였다. 사상 최초로 필리도는 위치 전략(Positional Play)과 폰 구조(Pawn Structure)라는 개념을 체스에 도입했다. 오늘날 마스터간의 대국은 전략과 폰 구조에서 승부가 나며 이를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마스터급은 물론 웬만한 아마추어 수준도 될 수 없다.

‘폰은 체스의 영혼이다’는 구절이 말해 주듯이 체스 전략에 있어 폰의 중요성을 필리도는 강조했다.

‘체스의 분석’을 집필한 필리도는 한때 오페라를 작곡하는 등 음악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1771년부터는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주로 눈가리개를 한 다면기(보통 2∼3대국)를 하며 ‘체스의 분석’ 재판과 영어 본을 출간하는 등 다시 체스에 전념한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1792년부터 영국에 머무르던 필리도는 1795년 런던에 묻힌다. 필리도 이후 체스는 위치상 전략과 폰 구조를 모르고 단순히 좋은 머리로만 정상급 선수가 될 수 없게 되었다.